94화 EP0093-0088화-귓가의 속삭임 4
“카엘! 도대체 언제 일어날 거야?”
익숙한 목소리에 흐려졌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데릭의 장난기가 잔뜩 묻은 그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동안 안 보이길래 대체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여기서 이렇게 편하게 누워 있었냐?”
편하게라니….
내가 지금 얼마나 답답한 상태인지 알면 그런 소리는 못 할 텐데….
그래도 바보 같은 녀석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얘기는 들었어. 그 로엔덤이 비밀리에 리자드맨들이랑 손잡고 제국 남서부를 뒤흔들려던 걸 네가 막았다며?”
……뭐?
“언제부터 그렇게 대단해진 거냐? 아카데미에 있을 때만 해도…. 아닌가? 하긴 네 녀석이 아카데미에서 보여준 걸 보면 평범한 놈은 아니긴 해.”
데릭이 호탕하게 웃었다.
로엔덤이 리자드맨과 손잡고 제국을 뒤흔들려 했다….
그렇게 정리된 건가…?
“그런 대단한 일을 해놓고 여기서 계속 누워만 있을 거야?”
데릭의 손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얼른 일어나서 네 입으로 무용담이나 들려줘라. 남들한테 전해 듣는 건 재미없단 말이야.”
나는….
나는 분명히 루크레치아가 레오폴트의 저택에 가서 겪었던 일을 듣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린 지금, 루크레치아는 온데간데없고 데릭이 내 옆에 있었다.
또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루크레치아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레오폴트에게….
그에게 완전히 가버린 걸까.
“뭐, 네 덕분에 이토록 아름다운 미인하고 같이 다닐 수 있어서 좋기는 한데 말이야.”
……미인?
순간 귀가 쫑긋 세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데릭 옆에 누가 있는 거지?
“카엘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냈어?”
엘레노아였다.
조금 전까지 복잡하게 뒤엉켜 있던 생각이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잠시 멈췄다.
엘레노아가 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다행히 어디 아픈 곳은 보이지 않네.”
그녀의 손이 조심스럽게 내 이마 위에 닿았다.
따뜻한 손길이 피부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래서 그런지….”
엘레노아가 작게 웃었다.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 같아.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그때 곁에 있던 엘레노아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내 입술에 입맞춤을 하며 깨어나길 바라던 그녀였다.
물론 여전히 내 이마를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했고 걱정하는 마음도 느껴졌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처럼 절박함이 묻어나지 않았다.
이미 내가 이렇게 된 상황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그 생각에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서늘해졌다.
엘레노아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매번 찾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하지만 정신만 깨어난 채로 이 어둠 속에 갇혀 있는 동안, 바깥의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이렇게 누워 있는 것조차 모두에게 당연해져 그저 생각날 때 한 번쯤 찾아와 옛 추억을 되새기는 대상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견디기 힘든 초조함이 다시 목을 조여왔다.
“그러자고요. 선배. 오늘 저녁은 제가 괜찮은 식당으로 잡았습니다.”
“그래…? 조금 기대되는데?”
식당 얘기가 나오자 엘레노아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방금 전까지 차분하던 음성 끝에 은근한 기대감이 묻어났다.
두근!
무언가, 무언가 이상했다.
데릭에게 말하는 그녀의 음성이,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데릭의 음성이….
마치…….
엘레노아가 내 이마를 쓰다듬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다음에 또 올게, 카엘군.”
잠깐만….
벌써 가려는 거야?
엘레노아….
나는 방금 막 정신을 차렸는데, 이제 또 얼마나 오랫동안 이 어둠 속에 혼자 남아 있어야 하는 거지?
몇 시간? 아니면 하루? 아니면 또 며칠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녀들이 다시 찾아오기만 기다려야 하나….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흐르면, 언젠가는 그녀들도 나를 그저 살아 있는 송장처럼 여기고 찾아오는 걸 멈추겠지.
그럼 나는….
나는 이 어둠속에서….
“그런데 그 식당에 꽤 괜찮은 술이 들어왔던데…. 술도 한 잔 하실래요?”
“……그럴까?”
나 깨어 있어.
네 목소리 다 듣고 있다고!
엘레노아!
하지만 당연하게도 내 외침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엘레노아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발소리가 문 쪽으로 멀어졌다.
“그러고보니 지난번에 얘기했던…….”
“그쵸? 한 번 맛보면…….”
끼익
문이 굳게 닫혔다.
어떤 공간에 있는지조차 모른 채 홀로 남겨졌다.
째깍 째깍
방 안에 시계라도 있는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태엽 소리가 적막 속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태엽 소리를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째깍! 째깍!
데릭과 엘레노아는 아마 제도의 괜찮은 식당으로 들어가서 창가에 앉을 것이다.
엘레노아는 창가에서 밖의 풍경을 보며 먹는 걸 좋아하니까….
갓 나온 음식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엘레노아는 눈앞에 놓인 접시들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겠지.
아까 식당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목소리부터 한 톤 높아졌던 걸 생각하면 분명했다.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맞은편에는 데릭이 앉아 있을 것이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봐 온 녀석이라면 분명히 은근슬쩍 엘레노아의 커다란 가슴을 쳐다봤을 것이다.
“이것도 한번 마셔봐요. 선배.”
데릭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엘레노아의 잔에 술을 따라줬다.
엘레노아는 처음에는 맛만 보겠다는 듯 조금씩 홀짝거리다가 달콤한 과실주의 맛에 반하며 더 달라고 했다.
“정말로 괜찮은데?”
“그쵸?”
맛있는 음식 앞에서 한껏 긴장이 풀린 채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갈수록 하얀 얼굴에는 붉은 기가 올라왔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점점 커졌다.
그렇게 오랜만에 웃고 떠들던 그녀는 어느 순간 얼굴을 굳힌 채 식탁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배?”
“…….”
엘레노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자 데릭은 은근슬쩍 자리를 옮겨 그녀의 옆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 즐겁게 떠들던 모습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그녀의 어깨가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선배.”
데릭의 목소리에서도 장난기가 사라졌다.
말없이 그녀의 흔들리는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서툴지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몇 번 어깨를 토닥였다.
엘레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참으려는 것처럼 입술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데릭이 툭하고 그녀의 어깨를 살짝 당기자, 엘레노아의 몸이 허물어지듯 데릭의 몸에 쏟아졌다.
“흐윽…! 흑…. 카엘군이….”
엘레노아는 흐느끼듯 데릭의 옷자락을 잡고 눈물을 쏟아냈다.
말없이 그녀의 울음을 받아주던 데릭은 빈 물잔에 술을 가득 따라 엘레노아에게 건넸다.
“선배. 이왕 이렇게 마신 거 오늘만큼은 힘든 거 다 잊어버리게 완전히 취해버리죠.”
“……”
“술에 잔뜩 취하면 잠깐이나마 힘든 걸 잊을 수 있을 거에요.”
엘레노아는 잠시 고개를 들어 잔에 가득 찬 술을 바라봤다.
달콤한 과실주였지만 몇번 홀짝인 것만으로 그녀의 몸이 더워질 정도로 도수가 꽤 센 음료였다.
저걸 한번에 다 마시면 아마 엘레노아는 완전히 취해서 인사불성이 될 게 분명했다.
“……응.”
엘레노아는 작게 대답하고 잔을 들어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게 술을 단번에 마시니까 완전히 취해 버렸어. 그때 숙소에서 루크레치아와 셋이서 마시던 거 기억나…?”
엘레노아의 목소리가 갑자기 귓가에 들려왔다.
무언가 이상했지만, 그 이상함을 느끼기도 전에 그녀가 해주는 말에 머릿속의 상상이 더욱 현실감 넘치게 펼쳐졌다.
“그때보다 더 취해서 완전히 몸을 가누지 못했거든. 다행히 데릭이 부축해서 숙소까지 데려다줬어. 침대에 눕혀주기까지 했어. 그런데 너무 더워서….”
데릭에게 부축당한 채로 침대에 같이 누워버리는 두 사람, 엘레노아는 더운 듯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완전히 술에 취해서 헛손질만 계속했다.
“너무 더워서…. 옷을 벗고 싶은데 혼자서 벗어지지가 않더라…. 그래서 카엘군한테 미안하지만 데릭군한테 옷을 벗겨달라고 했어.”
엘레노아의 부탁을 듣고 데릭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곧 손을 뻗어 셔츠의 단추를 풀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흰 셔츠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그녀의 커다란 가슴과 빨간 레이스 속옷이 그대로 드러났다.
“선배. 속옷때문에 가슴이 답답해보여요. 더울텐데 제가 풀어줄게요.”
“……으응, 아니…. 그건….”
딸깍
엘레노아가 당황하며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것보다 더 빠르게 데릭이 브라의 훅을 풀어 위로 들어올렸다.
“흐읏…!”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자, 엘레노아가 옅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잘게 떨었다.
동시에 데릭의 눈동자가 그녀의 가슴, 그것도 뿌연 모유를 살짝 흘리고 있는 유두로 향했다.
“선배…. 모유가…. 설마 임신 하신건가요?”
“흐읏. 아니야앗…! 이건 그냥 우연히 먹은 약의 부작용이….”
엘레노아가 뭐라고 하든, 데릭의 시선은 유두에서 떠나가질 않고 있었다.
“그 녀석이 내 유두를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하필이면 그 날따라 가슴에 모유가 가득 차 있었어. 당장…. 당장 누구라도 짜주길 바랄 정도로 버거웠거든….”
불현듯, 예전 아카데미 시절 데릭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합동 훈련 당시에 처음으로 본 엘레노아를 보면서 했던 녀석의 말은 분명히….
-미쳤다. 카엘. 나 결심했어. 무조건 저 가슴 만져볼꺼야. 꽉 쥐어서 미친듯이 빨아주겠어. 저 젖가슴을 한손으론 뭉개고 한손으로 쪽쪽 빨면….
“카엘군. 나도 모르게 있지…. 가슴에 모유가 너무 차서 불편하다고…. 도와달라고 해버렸어.”
엘레노아….
째깍! 째깍!
“그러니까 데릭군이 미친듯이 달려들어서 내 가슴을 물고 빨기 시작하는데…. 입술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손으로 잡아당기는 줄 알았어. 그렇게 강한 힘으로 빨기 시작하니까 모유가 주체없이 나오는거야….”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뜨겁게 헐떡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진심으로 빨고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안이 젖어버렸어. 데릭군이 능숙하게 내 팬티까지 다 벗겨버리고는…. 안으로 깊숙히 들어왔어.”
데릭이 그녀의 가슴을 거칠게 빨아대며 허리를 앞으로 흔드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째깍! 째깍!
“그건 안된다고…. 안된다고 저항했는데…. 데릭군이 내 손을 꽉 잡고 놔주지 않고 진심으로 계속 박으니까 나도 모르게 가버렸어. 헤헤….”
엘레노아의 고백을 들으며 내 자지가 빳빳하게 서버렸다.
째깍! 째깍!
“카엘군. 오늘도 데릭군하고 술 마시기로 했어.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나 그 진심에 무너질지도 몰라…. 루크레치아처럼 말이야. 루크레치아는….”
엘레노아는 불길하게 말끝을 흐렸다.
“루크레치아는 이제 로엔하임도 루크레치아란 이름도 버리고 루치아로 살아가기로 했어.”
아아….
“황태자의 애완견으로 평생 살아가기로…. 그리고 나는 아직 못 정했어. 그런데 카엘군. 나도 이제 지쳐가. 벌써, 벌써 3년이 지났어.”
3년.
그 말이 머릿속에 박힌 순간 아무런 생각도 이어지지 않았다.
……3년?
일주일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3년이라고?
내가 이렇게 누워 있던 시간이 벌써 3년이나 지났다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조금 전까지 떠올리고 있던 모든 생각이 한순간에 끊겨 버렸다.
도무지 현실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몇 번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뿐이었다.
그럼 그동안 루크레치아는, 엘레노아는, 나는….
그제야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째…깍! 째……깍!
3년.
그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나를 기다렸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 어둠 속에서 시간만 흘려보냈다.
째…까악! 째…끼…익….
귓가에 들리던 태엽 소리가 어딘가 망가진 것처럼 뒤틀리기 시작했다.
끼기긱…철컥!
톱니바퀴의 쇳소리가 거칠게 긁혔다.
철컥! 철컥!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태엽 소리라기보다 고장 난 기계가 억지로 움직이는 듯한 소리로 변해갔다.
머릿속까지 긁어내는 듯한 불쾌한 마찰음이 어둠 속에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철컥!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게 이어지던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콰직!
완전히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머릿속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번쩍!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거짓말처럼 떠졌다.
“……!”
눈부신 빛이 한꺼번에 시야를 덮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리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보인다.
3년 만에….
내 눈이 떠졌다.
“이제야 일어났네.”
낯익은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귓가에 속삭여주던 엘레노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좀 더 고혹적이고,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루멘시아의 목소리였다.
“어때? 기계신의 농락에 당한 기분이?”
“기계…신?”
루멘시아가 평소 보여 주던 고혹적인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마치 무생물을 바라보듯 냉랭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카엘. 넌 옛 신을 품은 채 봉인되어 평생 침상 위에 누워 지낼 뻔했어.”
“……그, 그게 무슨 말이죠?”
“네가 영원히 산 채로 미라가 될 뻔 했다는 거지.”
“제가 도대체 얼마나 누워 있던 겁니까?”
루멘시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대답해주었다.
“오늘까지 딱 일주일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