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EP0095-0090화-귓가의 속삭임 6
문이 열리는 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
루크레치아와 엘레노아의 눈이 똑같이 동그래졌다.
두 사람 다 놀란 듯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 역시 두 사람이 여기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왜 여기 있냐고? 아니면 왜 나를 포기했냐고?
그것도 아니면 레오폴트나 데릭은 어디있냐고?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킨 채 나는 무심코 방 안을 둘러봤다.
방에는 탁자 하나와 그녀들이 앉아 있는 의자 두 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탁자 위에는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한켠에는 붉은색 목줄까지 놓여 있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목줄이었다.
“…….”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지렁이처럼 보이던 글씨가 눈에 들어오자, 가장 위에 놓여 있던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종이 맨 위에 큼지막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 카엘군을 자극할 시나리오!
그 아래에는 항목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 마지막에 강아지처럼 짖기. (중요해요!)
- 황태자에게 완전히 넘어간 것처럼 말하기.
- 카엘군이 가장 싫어할 만한 호칭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세세하게 이야기하기.
“…….”
천천히 다음 장을 넘겼다.
레오폴트에게 가서 복종 선언을 하고 목줄에 매인 채 그의 저택에서 산책하고 능욕당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루크레치아가 내게 들려줬던 이야기들이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다음 장에는 데릭과 엘레노아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 데릭을 데려와서 지난번 술자리 얘기하기.
- 은근슬쩍 칭찬 유도해보기.
데릭과 엘레노아가 나오는 건 맞지만 처음 듣는 얘기들이 적혀 있었다.
“…….”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설마…….”
뒤늦게 루멘시아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하나씩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기계신에 의해 심연의 사도가 내 몸에 봉인되면서 나 역시 정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루멘시아는 그 봉인을 깨트려 나를 구했다고 얘기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기계신이 나를 다시 봉인하지 못하게 하려면 심연의 사도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기계신이 일정 이상의 힘을 쓰지 않고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기계신도 지나친 개입을 포기할 수밖에 없고, 다시 봉인될 위험도 사라진다고….
그렇다면 반대로, 봉인된 내 몸을 깨우기 위해 심연의 사도의 힘을 키웠다는 이야기도 성립할 것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심연의 사도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
심연의 사도가 원하는 건 내 연인이 누군가에게 안기고 빼앗기고 그들의 품 안에서 신음을 토하며 헐떡이는 것이고….
“……카엘군.”
“카엘.”
이들은 봉인된 나를 위해 내 귓가에 다른 사람에게 다리를 벌리고 다른 이와의 감정을 속삭이고 천박한 말과 행동을 연기한 것이다.
“아…. 두 사람…. 커흑!”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엘레노아가 그대로 내게 몸을 던졌다.
“카엘군!”
퍽!
갑작스럽게 받아낸 충격에 몸이 뒤로 넘어갔다.
“윽…!”
등이 바닥에 부딪치며 둔한 통증이 올라왔다.
“엘레노아. 갑자기 달려들면 어떡….”
엘레노아를 장난스럽게 나무나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 품에 파고든 엘레노아의 어깨가 작게 들썩이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품이 안긴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엘레노아의 머리 위에 올렸다.
익숙한 머리카락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녀의 약점이 자극되지 않도록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카엘군이, 흑…, 진짜로…, 나는….”
엘레노아는 울음에 잠긴 목소리로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하지만 흐느끼는 소리가 뒤섞여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나는 그런 엘레노아를 밀어낼 수 없었다.
그저 계속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엘군! 카엘군…!”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내 이름만 몇 번이고 반복하며 가슴팍에 얼굴을 더욱 깊숙이 묻었다.
“흐아앙! 으아아앙…!”
엘레노아는 눈이며 코며 입이며 할 것 없이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두 무언가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차마 평소처럼 놀릴 수가 없었다.
“진짜, 진짜로…. 흐윽…! 카엘군이!”
엘레노아는 결국 말하는 것조차 포기한 채 두 팔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래.”
스윽 스윽
“나 여기 있어.”
그 말을 들은 순간 엘레노아의 울음소리가 오히려 한층 더 커졌다.
“카엘….”
루크레치아가 내 이름을 부르며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내 몸을 꽉 끌어안은 채 엉엉 울고 있는 엘레노아를 잠시 바라보더니, 어디에 손을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엉거주춤 내 옆에 무릎을 꿇었다.
“…….”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끝이 내 뺨에 닿았다.
정말 내가 눈앞에 있는 게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몇 번이고 뺨을 쓸어보던 루크레치아의 손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카엘….”
그녀가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렀다.
“카엘!”
루크레치아가 그대로 내 머리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으읍…!”
얼굴이 그녀의 가슴팍에 푹 파묻혔다.
익숙한 루크레치아 특유의 살내음과 함께 희미한 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평소의 루크레치아라면 땀이 밴 상태로 이렇게까지 거칠게 끌어안는 일은 없었을 텐데….
지금은 그런 것조차 신경 쓸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루, 루크레치아. 잠깐, 숨이….”
나는 어떻게든 고개를 빼내려고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그때 머리카락이 닿은 쪽이 조금씩 축축하게 젖어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위에서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흑….”
엘레노아가 워낙 크게 울고 있어서 거의 묻혀버릴 정도로 작은 흐느낌이었다.
꾸욱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했는데, 루크레치아는 놔주지 않겠다는 듯, 내 머리를 꾹 눌러버렸다.
“아, 안 돼요. 지금은, 지금은 많이 부끄러우니까….”
결국 나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가슴과 머리에서 느껴지는 들썩임과 흐느낌을 들으며 가만히 그녀들의 온기를 느끼기로 했다.
한동안 두 사람이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격해진 감정들이 조금씩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흐읍….”
엘레노아가 먼저 울음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눈가와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벅벅 닦아낸 뒤 다시 나를 돌아봤다.
눈가는 잔뜩 붉어져 있었지만 입가에는 바보같이 헤실거리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헤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순간 입술을 꾹 다물며 참으려고 했지만….
“푸흡.”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엣?”
엘레노아의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
“왜, 왜 웃어?”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물은 대충 닦아냈는데 코 아래에는 아직 닦이지 않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투명한 콧물이 그녀의 콧구멍에서 깜찍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엘레노아가 내 시선을 따라 뒤늦게 손을 들어 코밑을 슥 훔쳤다.
그리고 자신의 손등에 투명한 콧물이 묻은 걸 발견해버렸다.
엘레노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자, 잠깐만!”
엘레노아는 황급히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나, 나 씻고 올게!”
“엘레노아, 잠깐…….”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키곤 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타다닥!
“아아악! 보지 마!”
문이 벌컥 열리고 엘레노아는 귀까지 새빨개진 채 그대로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쾅!
“…….”
갑자기 조용해진 방 안.
나는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피식 웃었다.
“카엘….”
“루크레치아. 솔직하게 얘기해줘. 내가 얼마나 누워 있던 거야?”
“일주일. 정확히는 엘렌브룩에서 구해서 제도로 데려온 뒤 일주일이요.”
루멘시아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이들이 내 귓가에 없던 일을 속삭였다 해도, 정말 3년이 지난 거였다면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지켜봐 온 그녀들의 마음이 얼마나 문드러졌을지 걱정됐으니까.
“다, 다행인가?”
“……당연하죠. 카엘이 이렇게 제 앞에 서 있다는 게….”
또르르륵
루크레치아는 다시 감정이 격해졌는지,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 내렸다.
방금 전 바보같이 울던 엘레노아랑 다르게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반짝이는 눈물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다.
놀림을 받고 자리를 뜬 엘레노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나는 애써 격해지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바닥에 떨어뜨렸던 종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거. 설명해 줄 수 있어?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는데….”
“……네. 해 드릴게요.”
루크레치아는 눈물을 슥슥 닦아내며 말했다.
“처음에 카엘에게 편지를 받았어요. 로엔덤에게 붙잡혀 있고….”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 황태자의 도움을 받으라는 편지.
그걸 받아든 루크레치아는 먼저 자신이 조금이나마 쌓아둔 인맥과 가문의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했으나 황제의 가장 충성스러운 귀족 가문과 마찰을 빚으려는 자들을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명확한 이유도 없이 로엔덤을 공격하려는 자는 아예 없었다.
루크레치아의 입장에서는 옛 신이나 리자드맨에 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쉽사리 꺼내기 어려웠다.
결국 루크레치아는 레오폴트를 찾아갔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레오폴트는 자신의 권한으로 움직일 수 있는 황실 근위대를 루크레치아에게 붙여 주었고 그녀는 그들을 이끌고 다급히 엘렌브룩으로 향했다.
하지만 엘렌브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마을 전체가 폐허로 변한 뒤였고, 그곳에 남은 것이라곤 정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촉수 덩어리뿐이었다.
아마도 내 안의 심연의 사도가 깨어나면서 변해버린 모습일 것이다.
“처음엔 늦었다고 생각했어요. 로엔덤이 그 힘을 얻은 결과라고 생각했고 카엘과 엘레노아는 이미….”
루크레치아는 그때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듯, 얼굴이 한껏 찌푸려졌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 거대한 촉수덩어리가 그대로 허물어지고 그 안에서 엘레노아와 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때마침 리자드맨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고, 루크레치아는 지체 없이 근위대를 이끌고 그들을 격퇴한 뒤 우리를 구출해 제도로 데려왔다.
그 다음은 간단했다.
깨어나지 않는 나를 깨우기 위해 루멘시아를 찾아내고….
“정확히는 그녀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지만요.”
아르세인에 가서 루멘시아를 찾으려고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가 먼저 찾아와서 나를 깨울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일주일 내내 마치 3년이 지난 것처럼 연기하며 나를, 내 감정을, 심연의 사도를 속였다.
그렇게 내 감정을 자극해 심연의 사도의 힘을 끌어올리고 봉인을 깨뜨린 것이었다.
“…….”
잠, 잠깐.
뭔가 이상했다.
이 모든 게 그녀들의 연기였다는 건 이해했는데….
내 시선이 순간 탁자 위의 목줄로 향했다.
“루, 루크레치아. 편지는…. 편지는 진짜였던거야?”
“…….”
루크레치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탁자 위에 있는 목줄을 만지작거렸다.
“네.”
그녀의 짧은 대답이 천둥처럼 들려왔다.
편지까지 전부 거짓말이고, 나를 속이기 위한 장치인 줄 알았는데….
그건 진짜였다고?
그럼 편지를 쓴 건….
그걸 건네받은 루크레치아가 레오폴트의 앞에 가서….
불끈!
순간 하체의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옷 위로 윤곽을 드러내는 내 자지로 루크레치아의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카엘. 당신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다고 했듯이….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어요.”
“…….”
“물론 엘레노아와 마주하면서 그 편지가 카엘이 보낸 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 되버렸으니깐요.”
“그럼 루크레치아 너는….”
루크레치아는 처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그녀는….
“황태자의….”
“그의….”
레오폴트의….
“암캐가….”
“정치적 자산을….”
……?
“……카엘?”
루크레치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