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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미궁 3


24화. 미궁 3 엘레노아가 촉수 마물에게 습격당한 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태양이 비추지 않는 미궁 내에선 시간 흐름을 알 수 없었으니까. 다만 체감상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적어도 반나절 정도 걸린 것 같았다. ​ 다행히 엘레노아의 몸에는 큰 상처는 없어 보였다. 독에 중독된 흔적, 괴사나 변형이 일어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기괴한 마물에게 습격당한 피해자들이 끔찍하게 망가진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기에,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약간 상기된 얼굴과 살짝 거친 숨소리는 어딘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기에 정확히 판단하기엔 어려웠다. ​ 턱 ​ “카엘.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 루크레치아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은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 “응…. 하지만 내가 방심했어. 혼자 가게 했으면 안됐는데….” “으음……. 카엘군?” “엘레노아!” ​ 엘레노아가 눈을 떴다. 그녀는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눈이 반쯤 풀린 채 나를 올려다봤다. ​ “괜찮아?” “으응…. 아!” ​ 멍하니 대답하던 그녀는 곧 눈을 크게 부릅뜨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아직 몸에 힘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 “앗……!” ​ 엘레노아의 몸이 휘청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덮어두었던 겉옷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 풀썩. ​ 겉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엘레노아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듯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봤다. ​ “꺄악!” ​ 그녀의 비명이 미궁 안에 울려 퍼졌다. ​ “엘레노아. 카엘한테 매일 밤 만져달라고 해놓고 이젠 부끄러워?” “그! 그거랑 조금 다르잖아요!” ​ 루크레치아의 지적에 엘레노아는 얼굴을 붉히며 내 겉옷을 잡아 끌어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 “엘레노아. 어떻게 된 건지 기억나?” “아니…. 잘 모르겠어. 순간적으로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 엘레노아는 기억을 더듬듯 미간을 찌푸렸다. ​ “그다음은 기억이 안 나. 뭔가 뒤에서 확 덮쳐오는 느낌이 들었고, 몸이 붕 뜬 것 같았는데…… 그 뒤로는 그대로 의식이 끊겼어.” ​ 엘레노아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 “정말 순식간이었어. 소리를 지를 틈도 없었고, 마력을 끌어올릴 시간도 없었어. 눈 깜빡할 사이에 당했어.” “어쩌면 초입에 만났던 미노타우르스보다 그런 마물을 더 경계해야겠어. 특히 놈이 벽 틈 사이로 들어 간 걸 보면 통로에 있는 마물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의 기습도 조심해야 해. 그보다 엘레노아. 몸을 일으킬 순 있겠어?” “으응? 한번 해볼게….” ​ 엘레노아는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팔만 달달 떨릴뿐,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 “그 마물의 체액에 뭔가 독 같은 게 있는건가?” “하아….” ​ 엘레노아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 “뭔가…. 힘이 안들어가……. 그리고…….” “그리고?” “하앗…. 어딘가 흥분이 되는거 같아.” ​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루크레치아는 엘레노아의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확인하더니, 내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조심스럽게 겉옷을 들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 “카엘. 아무래도 일종의 최음제 같은 것 같아요.” “최음제?” “네. 단순한 마비독은 아니에요. 몸의 힘을 빼앗는 동시에 감각을 과하게 예민하게 만드는 종류예요.” “그럼 엘레노아는…….” “지금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에요. 다만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고, 감각도 평소보다 훨씬 예민해져 있을 거예요.” ​ 엘레노아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 “다행히 체액이 피부 안쪽까지 깊게 침투한 건 아니라서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가라앉겠지만, 당분간은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거예요.” ​ 나는 이를 악물었다. ​ “아마 번식 때문일 거예요.” ​ 루크레치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마물은 스스로 번식하지 못하니까요. 특히 저런 종류라면 다른 종족의 여성을 산 채로 끌고 가서 번식에 이용하려 했을 가능성이…….” “루, 루크레치아…….” ​ 그녀는 내가 덮어준 겉옷을 양손으로 꼭 붙잡은 채 몸을 움츠렸다. ​ “그, 그런 걸 왜 그렇게 침착하게 설명하는 거예요…….” ​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아직 몸에 힘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방금 들은 설명 때문인지 엘레노아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루크레치아는 그런 엘레노아를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 “상황 파악이 먼저야. 부끄러워 하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그, 그게 더 부끄럽게 들리거든요…….” ​ 엘레노아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겉옷을 끌어안았다. ​ “그런 건가…….” ​ 마물이 엘레노아를 삼키려 했던 건 몸의 힘을 빼앗고, 의식을 흐리게 만들고,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둥지까지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끔찍한 상상이 떠올랐지만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잊어버렸다. ​ “조금만 늦었어도…….” ​ 나는 품에 안긴 엘레노아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아직도 몸에 힘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지 내 품 안에서 가늘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실수했으면 엘레노아는 그 마물의 둥지까지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쉽게 구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 “빌어먹을……. 일단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는 건 무리겠네.” “네. 엘레노아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쉬어야 해요.” ​ 엘레노아는 아직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미안해, 카엘 군…….” “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야.” ​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 “오히려 우리가 방심했어. 여기가 안전하다고 생각한 게 실수였지.” ​ 루크레치아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쉬어가기 좋다고 생각했던 곳이 처음부터 마물이 먹잇감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어낸 함정이었을지도 몰랐다. ​ “아니면 차라리 다시 틸렌으로 돌아갈까?” ​ 엘레노아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 “일단은 조금만 더 버텨보자.” ​ 엘레노아는 아직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 “곧 힘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지금 나 때문에 바로 돌아가는 건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위험하다고?” “응. 카엘군. 지금의 나는 솔직히 짐덩이나 마찬가지야.” ​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 “이 상태로 돌아가다가 두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마물과 맞닥뜨리면 어쩔 거야? 나까지 챙겨야 하니까 제대로 싸우기도 힘들잖아.” ​ 그 말에 나는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엘레노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가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미궁을 되돌아가는 건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었다. ​ “그리고 방금 그 마물 말이야.” ​ 엘레노아는 우리가 괴물을 쫓아낸 벽 틈 쪽을 바라봤다. ​ “아마 이 근처를 자기 구역으로 삼고 있던 놈일 거야. 물줄기도 있고, 통로에서 살짝 벗어난 공간도 있으니까 먹잇감을 기다리기 딱 좋잖아.” “그건…… 그렇지.” “그런 마물들은 보통 자기 구역을 쉽게 떠나지 않아. 그리고 우리가 방금 그놈을 쫓아냈으니까, 적어도 당장은 다른 마물이 함부로 들어오진 않을 거야.” ​ 엘레노아는 힘겹게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어갔다. ​ “마물끼리도 영역이 있잖아. 강한 놈이 자리 잡은 곳에는 약한 놈들이 잘 안 들어와. 그러니까 오히려 지금은 여기가 제일 안전할 수도 있어.” ​ 루크레치아도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일리는 있어요. 적어도 이 주변에 있던 마물들은 방금 그 개체를 피해 다녔을 가능성이 높아요. 놈이 도망친 직후라면 당분간 이 구역은 비어 있겠죠.” ​ 나는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엘레노아를 억지로 데리고 움직이는 것보다, 그녀의 힘이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경계를 세우고 버티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 “……알겠어. 대신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움직인다.” “응. 고마워, 카엘 군.” ​ 엘레노아는 미안한 듯 웃으며 겉옷을 조금 더 끌어안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신이 없을 텐데 그녀의 똑똑한 머리는 여전히 우리 파티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 “그럼 일단…….” ​ 나는 우리가 가져온 짐들을 담아둔 배낭들을 한 곳에 모아 몸을 기댈 수 있는 받침대로 만들어주었다. ​ “엘레노아. 일단 여기에 편하게 기대서 누워 쉬고 있어.” “고마워. 카엘군.” ​ 배낭더미에 몸을 기댄 엘레노아는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동안 우리는 잠든 엘레노아 근처에서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그녀가 틸렌에서 잔뜩 사둔 간식들 때문에 심심하진 않았다. ​ 쿵! ​ “……! 루크레치아?” “카엘. 여기서 멀어요.” ​ 루크레치아와 나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경계했다. ​ 쿵! 쿵! 콰앙! ​ “이건…….” ​ 루크레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 “네. 누군가 싸우고 있는 것 같아요. 아마도 다른 제국 기사일 확률이 높을 거에요.” “어떻게 하지?” “카엘의 결정을 따를게요.” ​ 나는 잠든 엘레노아를 바라봤다.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녀를 두고 움직이는 건 위험했다. 하지만 저 소리가 정말 다른 제국 기사들의 전투라면,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우리가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이에 그들이 전멸한다면, 우리 역시 곧 같은 위험과 맞닥뜨릴 가능성이 높았다. ​ “내가 보고 올게.” “혼자요?” ​ 루크레치아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엘레노아를 혼자 둘 순 없어. 넌 여기 남아서 엘레노아를 지켜줘.” “카엘.”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돌아올게.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확인만 하는 거야.” ​ 루크레치아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결국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무리하지 마세요.” “알아.” “그리고 정말 위험하면 돕겠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바로 돌아와요. 엘레노아가 움직이지 못하는 이상, 지금 우리는 평소처럼 싸울 수 없으니까요.” “응.” ​ 나는 검을 고쳐 쥐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다행인지 가는 동안 따로 마주치는 마물은 없었다. 굉음은 점점 가까워졌다. ​ 쿵! 콰앙! 미궁의 벽과 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마력을 끌어올려 투시 능력을 사용했다. 순간 시야가 벽 너머로 번져나갔다. ​ “미노타우르스……?” ​ 정확히 보이진 않았다. 벽이 여러 겹 겹쳐 있는 탓에 형태가 뭉개져 보였고, 움직임 역시 흐릿했다. 하지만 저 압도적인 체구와 뿔의 형태만큼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미노타우르스였다. ​ 그 미노타우르스를 상대로 누군가가 싸우고 있었다. 미노타우르스의 거대한 몸이 벽을 들이받을 때마다 굉음이 울려 퍼졌다. ​ ‘다른 제국 기사인가?’ ​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상대의 수가 몇 명인지도, 지금 우세한 쪽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야 했다. ​ 나는 투시를 거두고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발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모퉁이를 돌아, 굉음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조금씩 접근했다. ​ 쿵! ​ 그 순간, 차갑고 날카로운 감촉이 목덜미에 닿았다. ​ “움직이지 마.” ​ 낮게 가라앉은 여성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목 뒤에 닿은 것은 단검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피부가 갈라질 만큼 날카로운 칼날이 내 목덜미를 정확히 누르고 있었다. ​ “손. 천천히 검에서 떼.” ​ 등 뒤의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 목덜미에 닿은 칼날이 살짝 파고들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가져가려 했다. 그 순간 미래시를 발동했다. 수십 개의 잔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 내가 몸을 숙여 칼날을 피하는 미래. 팔꿈치로 뒤의 여자를 밀쳐내는 미래. 검을 뽑아 반격하는 미래. 옆으로 굴러 거리를 벌리는 미래. ​ 하지만 그 모든 미래의 끝은 같았다. 목덜미가 갈라지거나, 손목이 베이거나, 등 뒤에서 날아든 단검에 허벅지가 꿰뚫렸다. 여자는 이미 내가 도망칠 수 있는 모든 방향을 막아두고 있었다. ​ 피할 곳이 없다. ​ 나는 짧게 숨을 삼켰다. 억지로 움직였다간 목이 먼저 날아간다. 나는 검 손잡이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 “검도 바닥에 내려놔.” “…….” “천천히. 괜한 짓 하지 말고.” ​ 나는 이를 악문 채 허리춤의 검을 뽑아 바닥에 떨어뜨렸다. ​ 챙그랑. ​ 검이 미궁의 돌바닥에 부딪히며 차가운 소리를 냈다. ​ “앞으로 걸어.” “어디로?” “네가 몰래 훔쳐보던 곳.” ​ 나는 말없이 앞으로 걸었다. 목 뒤의 단검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그대로 목을 그을 생각인지, 등 뒤의 여자는 내 숨소리 하나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짝 붙어 있었다. ​ 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래시를 사용해봤지만 여전히 도망치거나 역으로 제압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넓은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방금 전까지 들려오던 굉음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미노타우르스. ​ 거대한 몸을 가진 마물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놈의 목은 반쯤 부서져 있었고, 가슴에는 깊은 상처가 여러 개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 볼프람 폰 로엔덤. 그는 쓰러진 미노타우르스의 어깨 위에 한쪽 발을 올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이게 누구신가 했더니….” ​ 볼프람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 “틸렌에서 본 평민이군.” ​ 나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 “볼프람.” “여전히 건방지군.” ​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 “세레나. 그놈 제대로 붙잡고 있어라. 괜히 날뛰면 목줄을 끊어도 좋다.” “네.” ​ 등 뒤의 여자가 짧게 대답했다. 그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 목덜미에 단검을 겨누고 있는 여자는 틸렌에서 봤던 보라색 머리의 제국 기사, 세레나였다. ​ “혹시 모를 추가 기습에 대비해서 세레나에게 주위를 경계하라고 했는데, 아주 재미있는 걸 물어왔군.” ​ 볼프람은 미노타우르스의 시체에서 내려오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 “설마 틸렌에서처럼 또 뒤에서 날 기습하려고 숨어 있던 건가?” “기습?” ​ 나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 “틸렌에서의 일이 어떻게 기습이지?” ​ 볼프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뭐?” “먼저 엘레노아를 모욕한 건 너였다. 그녀가 화를 낸 건 그 뒤였고. 애초에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싸움이 벌어질 이유도 없었어.” ​ “하…!” ​ 볼프람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 “그래서? 내 말 한마디에 이성을 잃고 마력을 휘두른 게 정당방위라도 된다는 건가?” “정당방위라고 말한 적은 없어. 하지만 그걸 몰래 기습한 것처럼 말하는 건 웃기다는 거다.” ​ 나는 목덜미에 닿은 단검을 의식하며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 “서로 얼굴을 보고 있었고, 네가 먼저 선을 넘었다. 그걸 뒤에서 몰래 찌른 것처럼 말하지 마.” ​ 볼프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조금 사라졌다. 하지만 곧 그는 다시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 “평민답게 말은 잘하는군.” “…….” “하지만 귀족 사회에서는 말 한마디에 칼을 뽑는 쪽이 더 천박한 법이다. 특히 한때 공왕가였다는 여자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마력을 휘둘렀다면 더더욱.” ​ 나는 이를 악물었다. 녀석은 일부러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엘레노아가 참지 못하고 달려들기를 바라는 것처럼. ​ “아무튼 그날의 일은 끝난 이야기다. 지금 내가 여기 온 건 전투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야.” “끝났는지는 네놈이 정하는 게 아니지.” ​ 볼프람은 미노타우르스의 시체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나를 내려다봤다. ​ “내 입장에서는 틸렌에서 나를 공격한 놈들의 일행이, 이번에도 내가 싸우는 장소 근처에 숨어 있던 셈이다. 그러니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 “자, 다시 묻겠다.” ​ 볼프람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다른 둘은 어디 있지?” ​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엘레노아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 “둘 다 쉬고 있다.” “쉬고 있다?” ​ 볼프람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 “이 미궁 안에서?” “전투가 계속 이어졌으니까. 잠깐 숨을 돌릴 장소를 찾았을 뿐이야.” “하…!” ​ 볼프람은 코웃음을 쳤다. ​ “미궁에서 휴식할 장소라. 참 편리한 말이군. 내가 알기론 이곳은 침대와 차가 준비된 여관이 아닌데.” “그런 뜻이 아니야.” ​ 나는 최대한 감정을 눌러 담으며 말했다. ​ “우리가 있던 곳에 마물이 하나 있었다. 벽 틈에 숨어 기습하는 촉수 형태의 마물이었지. 방금 전에 그놈을 쫓아냈다.” ​ 볼프람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 “그래서?” “거대한 마물은 보통 자기 구역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 정도는 제국 기사인 너도 알고 있겠지.” ​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 “방금 네가 쓰러뜨린 미노타우르스도 마찬가지야. 그런 놈이 자리를 잡은 구역 근처에는 어중간한 마물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한다. 잡아먹히거나 쫓겨날 테니까.” ​ 볼프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 “우리가 있던 곳도 비슷했어. 그 촉수 마물이 차지하고 있던 사냥터였고, 우리는 그놈을 쫓아냈다. 그러니 적어도 당장은 그 주변에 다른 마물들이 몰려들 가능성이 낮다는 거다.” “그러니까 네 말은…….” ​ 볼프람이 비릿하게 웃었다. ​ “네놈들이 미궁 안에서 마물의 구역을 빼앗아 휴식처로 삼고 있다는 건가?” “비슷해.” “참 대단하군. 평민 주제에 미궁 생태까지 꿰고 있다니.” ​ 비아냥거리는 말투였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괜히 말싸움을 이어가 봐야 좋을 게 없었다. ​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지?” ​ 볼프람이 한 걸음 다가왔다. ​ “정말 그런 장소가 있는지, 아니면 네놈이 우리를 함정으로 끌고 가려는 건지 알 수 없지 않나?” “믿든 말든 네 자유다. 하지만 내가 여기 온 건 전투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고, 네가 걱정하는 기습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면 안내해라.” “뭐?” “네놈이 말한 그 안전한 휴식처 말이다.” ​ 볼프람은 미노타우르스의 시체를 발끝으로 툭 찼다. ​ “나도 방금 미노타우르스를 처리했다. 세레나도 피로가 쌓였고, 나 역시 잠시 쉴 장소가 필요하다.” ​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 “그리고 우리도 같은 의뢰를 받은 제국 기사다. 굳이 협력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미궁 안에서 확보한 휴식처 정도는 공유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 나는 얼굴을 굳혔다. 정말로 우리가 안전한 공간을 확보했고, 다른 기사들이 휴식을 요청했다면 거절하기엔 어려웠다. 하지만 상대가 볼프람이라는 게 문제였다. ​ “거긴 우리 파티가 먼저 확보한 곳이야.” “그래서?” ​ 볼프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미궁 안에 자리세라도 낼 생각인가? 아니면 정말 뭔가 숨기고 있는 건가?” “…….” “네 말이 사실이면 우리도 잠시 쉬면 된다. 거짓이면 네놈이 우리를 속였다는 뜻이 되겠지.” ​ 그의 시선이 내 목덜미 뒤쪽에 선 세레나에게 향했다. ​ “세레나. 이 평민이 이상한 길로 안내하면 바로 베어라.” “네.” ​ 등 뒤에서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엘레노아와 루크레치아가 있는 곳으로 이 둘을 데려가는 건 위험했다. 하지만 여기서 거부하면 놈은 내 말을 거짓말로 몰아붙일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내게는 검도 없었다. ​ “……알겠다.” ​ 나는 낮게 대답했다. ​ “안내하지.” ​ 볼프람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 “그래. 그럼 가보자고. 네놈들이 차지했다는 그 안전한 휴식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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