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초상화 1
41화. 초상화 1
“으응…. 카엘군….”
나는 엘레노아의 잠꼬대를 들으며 일어났다.
잠을 잘못 자기라도 한건지 몸 이곳저곳이 근육이 뭉친 것처럼 당겼다.
잠깐…….
아직 멍한 머릿속으로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다.
그제야 밤새도록 엘레노아와 지칠 때까지 서로의 몸을 탐한 게 떠올랐다.
고개를 돌려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엘레노아를 내려다봤다.
반쯤 이불 사이로 드러난 나체에 내가 만든 부끄러운 자국들이 잔뜩 보였다.
-하앙! 너무 세게 물지마! 카엘구운!
으음…….
순간 마치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어젯밤 그녀의 외침에 나도 모르게 피가 쏠리는 게 느껴졌다.
“헤헤… 카엘군…….”
출렁!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엘레노아는 알 수 없는 잠꼬대를 중얼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옆으로 웅크려 있던 몸이 점점 넘어가다가 곧 천장을 향해 반듯이 눕자 이불에 가려졌던 그녀의 가슴이 물결치며 드러났다.
거대한 가슴은 천장을 향해 누운 자세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 부드럽게 눌리고 퍼진 곡선과 하얀 피부 곳곳에 남은 붉은 이빨 자국과 옅은 멍이 야릇하게 눈에 들어온다.
잠깐이라면…….
아침잠이 많은 엘레노아라면 잠깐 괜찮지 않을까…?
마치 나쁜짓을 저지르기 전에 심장이 천둥처럼 두근거리는 아이마냥 나도 모르게 긴장됐다.
“엘레노아?”
“흐응…. 거기야 거기….”
나는 그녀가 완전히 잠에 빠져든 걸 확인하고 상체를 숙여 그녀의 가슴을 입 안에 베어 물었다.
어젯밤 내내 마음껏 만지고 빨았을 그녀의 가슴인데, 고작 해가 뜨고 아침이 됐다고 왠지 모르게 나쁜짓을 하는 것 같았다.
쮸읍….
“흐응….”
그녀의 유두와 함께 가슴을 조심히 빨자 엘레노아가 옅게 신음을 흘렸다.
부드럽기 그지 없는 그녀의 푹신한 가슴이 주는 감촉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마치 달콤한 빵을 입에 물고 있는 것처럼, 정말로 그런 것처럼 입 안에서 묘한 단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카엘. 기분이 그렇게 좋나요?”
“흐아에에! 루크레치아!!”
나는 기겁하며 엘레노아의 가슴에서 입을 떼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나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루크레치아가 보였다.
“루, 루크레치아? 언제부터…….”
“처음부터요. 어젯밤 내내 벽이 무너질듯이 소리가 울려서 걱정돼서 아침부터 찾아왔는데…. 기우였군요.”
“아니…….”
나는 뭐라 변명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말은 나오지 않았다.
루크레치아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없이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흐트러진 이불을 집어 들어 엘레노아의 몸을 확실하게 덮어주었다.
엘레노아는 몸을 감싼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에 점점 숨소리가 잠잠해지더니, 곧 평온한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루크레치아는 잠든 그녀를 잠시 내려다봤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리해주고 이불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한 번 더 끌어올렸다.
그리고 루크레치아의 시선이 천천히 방 안으로 둘러봤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주위를 확인했다.
침대 옆 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병들과 의자 등받이에 걸린 구겨진 옷가지들.
그리고 방 안 곳곳에 남아 있는, 말라서 굳어버린 어젯밤의 흔적들까지….
멀쩡한 방이라곤 볼 수 없었다.
달그락.
루크레치아가 바닥에 있는 유리병 하나를 집어들었다.
“어제 도대체 뭘 한 건가요. 두 사람 다. 이건 뭐죠?”
“으응…? 그건… 글쎄…….”
나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어봤다.
열심히 서로를 탐하다 갑자기 엘레노아가 로브에서 병들을 꺼내더니 그걸 자기가 마시거나 혹은 입으로 넘겨주며 나눠 마셨다.
그제야 어젯밤의 우리의 행동들이 평범한 행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성욕의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밤새 여러번 사정했음에도 멀쩡했었으니까…….
“……카엘. 역시 제가 먼저였어야 했어요.”
“응? 루크레치아 뭐라고 했어?”
“…아니요. 정말이지…….”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카엘. 어제는 평소보다 더 기운찬 것 같네요. 밤새 쉬지도 않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루크레치아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유리병들을 탁자 위로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
“아래서 기다릴게요. 설마 힘들다고 쉬고 싶은 건 아니겠죠?”
“응…. 금방 준비하고 나갈게….”
평소와 똑같이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두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기에 나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쿵.
루크레치아가 문을 닫고 나갔다.
“에휴….”
나는 괜히 후회감이 몰려들었다.
적어도 의상실에서 준 알 수 없는 것들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그럼 아마 둘다 적당히 성욕을 해소하고 편하게 잠에 들었을테고, 오늘처럼 루크레치아에게 혼나는 일따윈…….
아니, 지금은 후회할 시간이 아니었다.
어제 엘레노아를 기다리게 한 것처럼 오늘 또 루크레치아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곧장 몸을 움직였다.
여관 직원에게 목욕물을 부탁하고, 그 사이 어질러진 방을 최대한 치우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했다.
아침의 찬 공기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살짝 꿉꿉한 방의 냄새를 싹 날려주었다.
“으응…. 추워….”
엘레노아의 잠꼬대를 들으며 나는 조금 더 이불을 끌어올려 그녀의 어깨까지 덮어주고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욕물이 준비되자 나는 거의 몸을 던지듯 씻었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몸을 닦고 평범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입던 정복은 다 헤졌고, 새 정복은 어제 엘레노아와 데이트때 입고 밤새 구석에 던져둔 탓에 잔뜩 구겨져서 입고 다니기엔 부끄러웠다.
“루크레치아”
“카엘. 일찍 내려왔네요.”
루크레치아는 이미 여관 1층에 서 있었다.
창가 쪽에 조용히 선 그녀는 평소처럼 단정했다.
짧은 금발은 흐트러짐 없이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푸른 눈동자는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복장은 단출했다.
아침 햇살이 그녀의 옆얼굴 위로 내려앉자 차갑고도 맑은 분위기가 더욱 도드라졌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어요.”
“오늘은 어디부터 갈까?”
“나가기 전에 아침부터 해결하죠.”
엘레노아처럼 밖에서 먹을 줄 알았는데 루크레치아는 그냥 이곳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나가자고 제안했다.
우린 곧 조용한 1층 식당 한켠에 자리잡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곧 여관 주인이 따뜻한 수프와 빵, 구운 소시지를 가져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게 방금 만든 것 같았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그럭저럭 괜찮게 배를채웠다.
“카엘.”
식사하는 내내 둘 다 별다른 말 없이 먹는데에만 집중했다.
그러다가 다 먹어갈때쯤, 루크레치아가 먼저 나를 불렀다.
“저도 제 방식대로 카엘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응.”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럼 어디부터 갈까?”
“지난번 미궁 이후에 아직 제대로 된 보급을 하지 않았잖아요. 일단 보급품들부터 사둘까요?”
“그래도 괜찮겠어?”
루크레치아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데이트잖아. 물품 보급같은 건 나중에 해도 괜찮은데…….”
“싫은가요?”
“아니! 절대로. 난 루크레치아와 뭘 하든 다 좋아.”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카엘과 함께 필요한 물건을 고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가.”
“네. 그리고 어차피 해야 할 일이잖아요.”
그정도로 정말 괜찮은 걸까.
그래도 데이트인데…….
“그래도.”
루크레치아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덧붙였다.
“보급만 하고 끝낼 생각은 아니에요.”
“그래?”
“네. 물품을 산 뒤에는 아르세인 광장을 구경해요. 듣기론 거기에서 초상화도 그려준다고 하더군요. 괜찮다면 한번 들려요.”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관을 나선 우리는 곧장 상점가 쪽으로 향했다.
어제 엘레노아와 함께 걸으며 느꼈던 아르세인의 활력과는 다른 차분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조용히 흥정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스쳐 지나가며 루크레치아는 한 곳도 놓치지 않고 주위를 샅샅이 둘러봤다.
“각성제는 넉넉히 챙기는 게 좋겠어요.”
“지난번에 많이 썼지.”
“네. 그리고 붕대와 지혈제도요.”
그녀는 짚어든 물건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고 판단했다.
간간히 상인과의 흥정도 하며 값을 최대한 깎으며 돈을 아끼기도 했다.
엘레노아와 루크레치아, 둘 다 몰락한 대 귀족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유독 엘레노아와 달리 그녀의 씀씀이는 평민인 나보다도 더 깐깐했다.
언젠가 한번 궁금해서 물어보니 척박한 북부에선 땔감조차 아껴 쓰지 않으면 혹독한 겨울을 나기 어렵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항상 이 파티의 재정은 그녀의 손 안에서 문제 없이 굴러갈 수 있었다.
“이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요.”
보급을 마친 우리는 상점가를 빠져나와 광장 쪽으로 향했다.
아르세인의 중앙 광장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분수대의 물줄기가 햇빛을 받아 잘게 부서지고 있었고 거리의 악사들은 광장 한쪽에서 느긋한 선율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광장 너머에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여러 명의 화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얀 석재로 지어진 성당은 높게 솟은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시선을 끌었다.
그 주변에는 작은 의자와 이젤을 펼쳐놓은 화가들이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초상화를 권하고 있었다.
“초상화… 그려달라고 할까?”
“네. 좋아요.”
뜻 밖의 대답이었다.
아까 아침을 먹으면서 그저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바로 대답이 나올 정도로 원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루크레치아는 이런 장식품이나 기념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쉽게 돈을 쓰지 않았고, 물건을 살 때도 항상 실용성부터 따졌다.
초상화를 어떻게 보관해서 들고 다닐까 하는 고민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그녀가 원하는대로 움직이기로 마음 먹었다.
“그럼 누구한테 받아보지…. 사람들이 많은 쪽이 좋겠지?”
화가들마다 실력 차이가 있는지 누군가는 대기하는 줄이 길었고 누군가는 아예 당장 초상화를 그리지 않고 대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중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법한 화가한테 가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루크레치아가 발걸음을 옮겨 나아갔다.
루크레치아가 멈춘 곳은 뜻밖에도 가장 구석진 자리였다.
그곳에는 젊은 화가 하나가 혼자 앉아 있었다.
이젤 옆에 놓인 작은 상자 안에는 제대로 팔리지 않은 스케치들이 몇 장 쌓여 있었다.
말 그대로 파리만 날리는 꼴이었다.
루크레치아가 그 앞에 멈춰 서자 인기척을 느낀 화가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그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아…….”
그의 시선이 루크레치아의 얼굴에 멈췄다.
그리고 그 시선은 아주 잠깐 아래로 내려갔다.
정말 찰나였다.
루크레치아의 몸을 훑어 내려가다가 가슴에서 멈칫했다.
순식간에 화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젊은 화가는 황급히 시선을 올리며 어딘가 어색한 미소로 외쳤다.
“초, 초상화 그려드릴까요?”
방금 전 자신이 어디를 보았는지 스스로도 의식한 듯 그는 애써 시선을 루크레치아의 얼굴에 고정하고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그런 젊은 화가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차분한 시선에 화가는 더 어쩔 줄 몰라 하며 붓을 쥔 손만 꼼지락거렸다.
잠깐의 침묵 이후 루크레치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특별하게 그려주실 수 있나요?”
“트, 특별하게 말씀이십니까?”
젊은 화가가 흠칫 놀라 되물었다.
“어떻게…… 특별하게 그려드리면 될까요?”
루크레치아는 잠시 생각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곧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양보다 더 뜨겁게 그려주세요.”
“…….”
그 말은 초상화를 주문하는 말이라기엔 이상했다.
화가의 반응은 더 이상했다.
어느 순간 화가의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조금 전의 어수룩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흔들리던 눈동자가 루크레치아를 똑바로 향했다.
“알겠습니다.”
그가 짧게 대답했다.
젊은 화가는 곧장 몸을 움직였다.
이젤의 각도를 고치고 종이를 새것으로 갈아 끼운 뒤 작은 상자에서 연필과 붓을 꺼냈다.
루크레치아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내 쪽으로 걸어왔다.
“카엘.”
“응?”
“저 사람에게 받아요.”
나는 젊은 화가 쪽을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루크레치아를 물끄러미 쳐다봤고 그녀도 나를 눈싸움 하듯 뚫어지게 바라봤다.
하지만 먼저 눈을 돌린 건 루크레치아였다.
“루크레치아. 방금 전 무슨 말이야?”
“그게 무슨 얘기에요?”
“태양보다 더 뜨겁게 그려달라니…. 무슨 암호문 같잖아.”
“그게…….”
루크레치아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목에 뭐라도 걸린 것처럼 쉽게 다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평소의 루크레치아라면 어떤 질문을 받아도 차분하게 대답했을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루크레치아.”
“……네.”
“이것도 루멘시아가 알려준 거야?”
그 순간 루크레치아의 어깨가 아주 작게 움찔했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제의 엘레노아와 방문했던 옷가게도 그렇고 지금 루크레치아가 말을 건 화가도 그렇고 모두 루멘시아가 준비해둔 무대였다.
나는…….
“카엘. 걱정말아요. 이건 누군가한테 협박 받은 것도…. 잘못된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에요. 엘레노아가 그랬듯…. 저도 그저 당신의 짐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내 몸을 내던질 수 있어요. 당신이 날 아카데미에서 구원했던 날 이후로…….”
“루크레치아…….”
그녀의 눈은 흔들림 없이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올곧음에 나는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어제의 엘레노아의 데이트는 오로지 그녀의 뜻대로 움직였다.
옷가게 탈의실에서 입으로 해준 것과 골목에서의 야외노출이나 모두 그녀의 행동에 내가 당한 것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루크레치아는 내 대답을 듣기 전엔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가만히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뒤쪽에 젊은 화가가 모든 준비를 끝마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도 느껴진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끝없는 고뇌를 했다.
누가 마련 했건 결국 그 무대 위로 올라가는 건 내 몫이 되어버렸다.
나는 내 의지로 루크레치아를 그 무대에 올려버리는 것이다.
“카엘.”
나직이 내 이름을 속삭이는 루크레치아.
빌어먹을 옛 신의 저주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여전히 나는 그녀들과 오로지 서로를 향해서만 사랑을 나누며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모두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살며시 피가 하체에 몰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하자.”
“네….”
루크레치아는 작게 대답하곤 화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몸을 살짝 숙여 그에게 무어라 낮게 속삭였다.
젊은 화가는 곧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둘러 의자 하나를 끌어와 성당과 분수대가 함께 보이는 방향으로 놓았다.
루크레치아는 별다른 말 없이 그 자리에 앉았는데 어쩐지 귀 끝만은 아주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