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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EP0059-외전-주둔지에서의 일 1


‘카엘….’ ​ 루크레치아는 의자에 앉아, 지금쯤 자신의 사랑스러운 연인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카엘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웃음이 새어나왔다. ​ 방금까지 만년설처럼 차갑게 굳어 있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자 마치 화사한 꽃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아쉽게도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 루크레치아는 지금 주둔지의 지부장이 머무르는 천막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가 칠흑같은 어두운 밤을 뚫고 새벽녘에 주둔지에 도착했을때 다행히 본대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주둔지 안 역시 막 하루를 시작하려는 자들로 분주할 뿐 습격이나 소란이 벌어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 굳이 이상한 점을 꼽자면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의 긴장감정도였다. 새벽부터 경계를 서느라 피곤할 법한데도 목책 위와 천막 사이를 오가는 병사들은 하나같이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머무는 주둔지인 만큼, 그 정도의 경계심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과한 해석일지도 몰랐다. ​ 밤새 달려 주둔지에 왔지만 정작 지부장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녀는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하는 수 없이 이렇게 텅 빈 천막 안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마음은 빨리 보고를 하고 카엘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 ‘더워…….’ ​ 이른 새벽인데도, 루크레치아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맺혀 있었다. 천막 안은 바깥보다 공기가 답답했다. 긴 이동으로 달아오른 몸은 좀처럼 열이 식지 않았고 옷깃 안쪽으로 흘러든 땀이 피부를 끈적이게 만들었다. ​ ‘북부가 그리워….’ ​ 더운 날이 거의 없고 시원한 공기가 가득한 북부로 매번 돌아가고 싶었다. 그곳에 돌아가 끝없이 펼쳐진 설원 위를 걸으며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문이 재건될 때까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거기다가……. ​ ‘카엘….’ ​ 가문이 복권되더라도 과연 그의 곁을 떠날 수가 있을까…? 그를 데릴사위로 삼아 북부로 데려가는 것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의 신분을 평민으로만 남겨 둘 수는 없었다. ​ ‘엘레노아도 문제야….’ ​ 거기다가 그 점이 해결되더라도 카엘의 또다른 연인인 엘레노아가 문제였다. 과연 카엘은 엘레노아를 놔두고 자신만을 바라보러 북부로 와줄까…? 아니면 두 사람 모두 북부로 와 셋이서 지내려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과연 복권된 로엔하임의 가주가 된 자신이……. 연인을 공유하는 걸 용납할 수 있을까? ​ ‘루크레치아 폰 로엔하임…. 카엘 폰 로엔하임….’ ​ 루크레치아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머릿속에는 이미 둘이 두터운 북부식 털옷을 입은 채 같이 사냥을 즐기고 있는 상상이 떠올랐다. ​ ‘그러니…. 이번 토벌에서 공을 세워야해. 그렇다면 카엘의 서훈이 확실시될 거야….’ ​ 거기까지 생각한 루크레치아는 잠시 열기라도 식힐 생각으로 손끝에 마력을 끌어모았다. 작은 얼음 조각 하나면 충분했다. 하지만…. ​ 스르륵 ​ 손끝으로 모여들던 차가운 마력은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흩어져 버렸다. 루크레치아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 척추를 타고 흐르는 꺼림칙한 불길함이 느껴졌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다만 로엔하임의 피 속에 흐르는 오래된 감각이 그녀에게 무언의 경고를 하고 있었다. ​ ‘…….’ ​ 방금 전까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일들이, 이제야 하나씩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왜 병사들은 그리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을까…. ​ ‘내가 놓친 게 있나…?’ ​ 척 척 ​ ‘……온다!’ ​ 천막 바깥에서 여러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지부장만 오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거기다가…. ​ ‘피냄새!’ ​ 새벽 공기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옅은 피냄새가 느껴졌다. 평소라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주변에서 식량을 더 구하기 위해 사냥을 했을 수도 있고 마물과 마주쳤을 수도 있다. 토벌대의 주둔지라면 피 냄새쯤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상황들이 연달아 겹치자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 ‘변절자…. 이미 주둔지가 넘어간 건가? 지부장은 죽은 걸까?’ ​ 머릿속이 팽팽하게 돌아갔다. ​ ‘여기 있다간 당한다.’ ​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능력이 사라진 지금의 자신은 검을 잘 다루는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 루크레치아는 망설일 틈조차 없이 다급히 움직였다. 검을 뽑아 들고 입구와 정반대편에 있는 천막 벽을 단번에 베어 냈다. ​ 촤악! ​ 루크레치아는 몸을 낮춘 채 그대로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 “도망쳤다!” ​ 등 뒤에서 고함이 터졌다. 그녀의 선택이 옳았다는 찬사나 다름 없는 외침이었다. ​ “주둔지 밖으로 나가기 전에 잡아라!” “동쪽과 남쪽을 막아!” ​ 방금 전까지 조용하던 주둔지 전체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루크레치아는 수레 뒤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였다. 이대로 목책을 넘어 달아날 수는 없었다. 능력은 봉쇄되어 있고 주둔지 전체가 자신을 찾고 있다. 정면으로 돌파한다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 그때 주둔지 중앙에 세워진 가장 큰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 은빛 머리카락과 새벽빛 속에서도 선명한 붉은 눈동자…. 레오폴트 황태자였다. ​ 그는 소란스러워진 주둔지를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 없는 듯한 태도였다. 그 모습에 루크레치아는 의아했다. ​ ‘황태자는 왜 멀쩡할까…. 설마 그도 변절자인가?’ ​ 황태자가 이끄는 토벌대의 본대가 변절자들에게 넘어갔는데, 정작 황태자는 멀쩡하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만약 황태자가 변절자들과 한 패라면 모든 게 설명이 가능했지만…. ​ 다만 그건 루크레치아에게 최악의 가정이었다. 그럼 애초에 토벌대의 조직부터 모든 게 다 함정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으니까. ​ 카엘과 자신들의 생존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졌다. 도대체 황태자가 제국을 배신하고 뭘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생존이었다. ​ 잠시 동안 주둔지를 바라보던 레오폴트는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 ‘주위에 경계하는 병사들이 적어.’ ​ 황태자의 천막은 다른 곳보다 한산했다. 원래라면 다른 곳보다 더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고작해야 몇몇 병사들이 천막 인근에 서 있는 게 전부였다. ​ ‘어떻게 해야할까….’ ​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순간 이대로 빠져나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떻게든 탈출구를 마련해야했다. ​ ‘황태자의 능력은 텔레파시….’ ​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는 능력….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아직 숨겨진 능력이 더 있을 수는 있었으나……. ​ ‘여전히 능력은 사용 불가능해.’ ​ 지부장의 천막을 나온 지금도 능력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황태자 역시 능력을 쓰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루크레치아는 그렇게 믿어 보기로 했다. ​ 자신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다른 자들보다 느긋하게 자신의 천막에서 쉬고 있을 황태자를 제압하는 게 더 쉬운 길일 것이다. ​ 루크레치아는 주변의 병사들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틈을 노려 몸을 낮췄다. 그녀는 소리 없이 수레와 천막 사이를 지나 황태자의 천막을 향해 다가갔다. ​ 주둔지 곳곳에서 고함이 터지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하자 황태자의 천막을 지키던 병사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바깥으로 쏠렸다. ​ 루크레치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 몸을 낮춘 채 천막 뒤편으로 돌아간 그녀는 경계병 하나가 반대쪽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천막의 틈 사이로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갔다. ​ 안쪽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천막 안쪽에서는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다. ​ 루크레치아는 숨을 짧게 들이켰다. 능력은 아직 봉쇄된 상태였다. 남은 것은 손에 쥔 검과 지금까지 몸에 익힌 검술뿐이었다. ​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천막 안쪽의 칸막이를 젖히며 그대로 몸을 던졌다. ​ “……!” ​ 안에 있던 남자가 놀란 듯 몸을 돌렸다. 루크레치아는 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어깨를 밀어 넘어뜨렸다. 그대로 그의 위에 올라탄 채 검끝을 목울대 아래에 겨눴다. ​ “움직이지 마세요.” ​ 잠시 굳어 있던 남자의 붉은 눈이 천천히 커졌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본 레오폴트의 입가에 느긋한 미소가 번졌다. ​ “……루치아.” “전하…….” “신기하구나. 네가 스스로 내 몸에 올라타다니. 이제야 좀 생각이 바뀌었나?” “…….” ​ 루크레치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검끝이 레오폴트의 목 아래를 조금 더 파고들었다. 주르륵 가느다란 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 “제국을 배신하신 겁니까?” ​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레오폴트는 목에 닿은 차가운 검날을 느끼면서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군.” “어젯밤, 수색조가 습격당했습니다. 변절한 기사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광신도들의 소행이었습니다.” ​ 루크레치아의 푸른 눈이 그의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 “그 사실을 보고하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지부장은 사라졌고 능력을 전혀 사용할 수 없더군요.” ​ “…….” ​ “이게 우연이라고 생각해야 합니까, 전하?” ​ 레오폴트의 목에서 흘러내린 핏줄기가 옷깃을 적셨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당황한 기색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 “아마 제물 의식이 진행 중이기 때문일 거다.” “제물 의식?” “그 영향권 안에서는 제국 기사의 능력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지. 네 몸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 테니, 그 점은 안심해도 된다.” ​ 루크레치아는 그의 말을 듣고도 검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푸른 눈동자가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 “전하께서 어째서 그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부터 설명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레오폴트는 짧게 웃었다. ​ “착각하고 있군. 루치아.” ​ 그는 목에 검이 겨눠진 상태에서도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 “지부장이 변절자들의 핵심이다. 광신도들과 손을 잡고, 이 주둔지를 통째로 넘긴 장본인이기도 하지.” ​ 루크레치아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 “그럼…… 다른 기사들은.” “멀쩡했던 제국 기사들은 이미 대부분 제물로 끌려갔다. 저들이 이곳을 조용히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 레오폴트의 붉은 눈이 천막 바깥을 향했다. ​ “나는 인질이다. 황태자라는 이름이 있으니, 놈들도 쉽게 손댈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나를 방패로 삼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 그는 다시 루크레치아를 올려다봤다. ​ “지금 이 주둔지 전체가 제국의 적이니까.” “읏…….” ​ 그때 천막 바깥에서 들려오는 기척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레오폴트는 느긋하게 귀를 기울이다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 “추격자들이 이곳까지 왔군.” ​ 루크레치아의 시선이 천막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얼굴에 초조함이 스쳤다. 레오폴트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루크레치아의 뺨에 닿으려 했다. ​ “능력을 쓰지 못하는 너는, 결국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여린 여자에 불과하군.” “손 치우십시오.” ​ 루크레치아는 고개를 살짝 틀어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나 레오폴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낮게 웃었다. ​ “아카데미 시절이 떠오르는군. 그때도 나는 이렇게 너를 내려다보고 있었지.” ​ 그가 천천히 그녀를 훑었다. ​ “아니, 티몽 백작의 의뢰 때도 마찬가지였나.” ​ 루크레치아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흔들렸다. 분노가 억눌린 눈빛이었다. ​ “남의 소중한 것으로 협박하던 품위 없는 짓은 여전하시군요.” ​ 천막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때 천막 바깥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황태자 전하. 안에 계십니까?” ​ 루크레치아의 눈빛이 곧장 입구 쪽으로 향했다. ​ “주둔지 안에서 수상한 자가 발견됐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혹시 안에 이상은 없으셨는지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천막 안을 잠시 수색해도 되겠습니까?” ​ 레오폴트는 목에 겨눠진 검을 보며 작게 웃었다. ​ “선택해라, 루치아.” “무슨 말씀입니까?” “이대로 저들에게 잡혀가면 광신도들의 제물이 되겠지. 그리고 네 연인이 아무것도 모른 채 널 찾으러 이곳까지 왔다가 너와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될거다.” ​ 루크레치아의 손끝이 굳었다. ​ “카엘은…….” “네가 사라졌는데 가만히 있을 남자가 아니지 않나.” ​ 레오폴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밖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전하? 안에 계십니까?” “루치아. 저들의 인내심에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거다.” ​ 레오폴트가 낮게 답한 뒤, 다시 루크레치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 “그런 결말이 싫다면 내게 도움을 청해라” ​ 루크레치아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 “이 모든 게 전하의 함정일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믿겠습니까?” “나는 제국의 후계자다.” ​ 레오폴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 “내 손에 들어올 황금빛 미래를, 광신도 따위에게 넘겨 주고 스스로 무너뜨리는 취향은 없다.” ​ 그의 두 눈은 흔들림 없이 루크레치아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루크레치아가 알고 있는, 거짓말 할때 나오는 특유의 행동들이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레오폴트라면 자신의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그런 사소한 버릇까지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더 의심만 하며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천막 바깥에서 누군가가 천을 걷으려는 듯 입구 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 루크레치아는 마지막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루크레치아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검을 거뒀다. ​ “……어떻게 도와주실 생각이십니까?” ​ 레오폴트는 마치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상체를 일으켰다. ​ “이곳에서 도망치는 건 어렵다.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상 루치아 너는 손쉬운 상대일테니까.” “…….” ​ 분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천막 한쪽으로 걸어갔다. ​ “그리고 네가 수색을 피해 숨는 것도 오래 버티진 못할 거다.” ​ 레오폴트는 낮은 장식장 아래에 놓인 작은 상자를 꺼냈다. 검은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였다.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은색 문양이 얇게 새겨져 있었다. 뚜껑을 열자, 안에는 여러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레오폴트는 그중 붉은 목줄 하나를 꺼내 들었다. 루크레치아의 시선이 목줄 위에서 멈췄다. 순간, 티몽 백작의 의뢰에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 “이건…….” “착용한 동안 보는 이들에게 너는 사람이 아닌 존재로 보이게 되는 아티팩트다.” ​ 레오폴트가 목줄을 들어 보였다. ​ “개로 보일 거다.” ​ 루크레치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그걸 어떻게 믿으라는 겁니까.” “직접 보여 주지.” ​ 레오폴트는 망설임 없이 붉은 목줄을 자신의 목에 채웠다. ​ 찰칵 ​ 작은 금속 장식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레오폴트의 모습이 흔들렸다. 은빛 머리카락이 흐릿하게 번지더니, 눈앞에 있던 황태자의 형체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 은색 털을 가진 커다란 개가 황태자의 옷을 그대로 걸친 채 두 발로 서 있었다. 지나치게 사람 같은 자세 때문에 기괴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개가 된 레오폴트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 “이제 믿겠나, 루치아?” ​ 찰칵. 그가 목줄을 풀어 내자 은색 털과 짐승의 형체가 순식간에 흐려졌다. 곧 눈앞에는 다시 은발과 적안을 지닌 황태자가 서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목줄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 “하지만 저건 너무 허술합니다. 겉모습만 개로 보일 뿐이지 않습니까. 두 발로 서 있고, 옷도 그대로인데요.” “세상에 완벽한 위장이 어디 있겠나.” ​ 레오폴트는 느긋하게 웃었다. ​ “제대로 속이고 싶다면 옷도 벗어야겠지. 그리고 두 발로 서 있을 게 아니라, 개처럼 네 발로 기어 다녀야 할 테고.” ​ 루크레치아의 두 눈이 순간 흔들렸다. ​ “자. 빨리 선택해라. 루치아.” ​ 레오폴트의 손에 들린 붉은 목줄이 천천히 흔들렸다. 루크레치아의 시선은 그 위에 붙들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왜…. 이러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목줄이 흔들리는 걸 보니 갑자기 목이 마르고 어딘가 몸이 살짝 뜨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특히 하복부에서부터 열기가 퍼지는 기분이었다. ​ “루치아.” ​ 황태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한 발자국만 더 다가가면 가슴이 닿을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지만 루크레치아는 어째서인지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점점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오는 목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찰칵! ​ 그리고 잠금장치가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것처럼 소스라쳤다. ​ “전하…!” “왜 그러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기에 동의한 줄 알았는데…?” ​ 루크레치아가 더 항의하려는 순간, 밖에서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 “황태자 전하. 죄송하지만 더이상 대답이 없으시다면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그 소리에 레오폴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 “루치아. 시간이 없다.” ‘카엘….’ ​ 그녀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연인의 얼굴을 속으로 되새긴 채 옷을 벗기 시작했다. ​ 스르륵…. 툭! ​ 하나하나 벗을때마다 드러나는 그녀의 순백의 나신을 레오폴트는 기꺼운 듯 쳐다보며 감상했다. 그런 그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며 루크레치아는 결국 마지막 속옷마저 모두 벗어던졌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숙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양 손을 땅바닥에 올려놓았다. 그 다음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루크레치아는 멍하니 레오폴트를 바라봤다. 하복부가 불에 데인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 “자…. 이제 한번 암캐마냥 짖어봐라. 루치아.” ​ 루크레치아는 자신이 왜 그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몸은 그의 말대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그저…. ​ “캉!” ​ 그의 말대로 암캐처럼 짖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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