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EP0079-0074화-감옥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지금 해야 할 일만큼은 분명했다.
우선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나는 즉시 마력을 끌어올려 몸을 강화했다.
팔다리를 옭아맨 구속을 힘으로 부수는 동시에 미래시를 펼쳐 세레나의 움직임을 확인하려 했다.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몸은 여전히 구속된 상태였고, 눈앞에 있는 세레나의 움직임을 보여줄 잔상도 보이지 않았다.
“흡!”
힘으로라도 구속을 풀어내려고 온몸에 힘을 주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그리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제 풀에 지쳐버렸다.
갑자기 얼굴에 음영이 지길래 고개를 돌려보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던 세레나가 한쪽 발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쿵!
그녀의 발이 그대로 내 가슴팍을 짓눌렀다.
“컥!”
가슴이 압박되며 숨이 턱 막혔다.
세레나는 마치 길가의 벌레라도 보는 듯 무심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발에 점점 힘이 실릴수록 가슴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그때,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레나. 그쯤하고 내가 허리를 숙이는 수고를 하지 않도록 그 평민의 몸을 일으켜라.”
볼프람.
그 역겨운 놈이었다.
세레나는 내 가슴에서 발을 치운 뒤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윽……!”
머리채를 붙잡힌 채 상체가 거칠게 끌려 올라가자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눈앞의 풍경은 발테리아의 우중충한 모습과 전혀 달랐다.
맑게 갠 하늘 아래에는 푸른 들판과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뒷짐을 진 채 나를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는 볼프람의 얼굴만 없었다면….
나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내 몸은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나무 상자 안에 있었고, 상자째로 짐마차의 적재함에 실려 있었다.
마차 주위로는 로엔덤의 문장이 새겨진 장비를 착용한 병사들이 서 있었다.
하지만 어디를 살펴봐도 엘레노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엘레노아는 어디 있지?!”
내 외침에 볼프람의 입가가 비뚤어졌다.
“아직도 네 처지를 깨닫지 못한 모양이군.”
퍽!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뺨을 강타했다.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세레나에게 머리카락을 붙잡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볼프람!”
분노를 토해내며 다시 한번 온몸의 마력을 끌어올렸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퍽!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버텼을 주먹 한 번에 눈이 핑 돌았다.
마력으로 강화하지 못한 몸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나약하게 느껴졌다.
볼프람이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내 목을 노리고 찾아온 것들이 제국 기사들인데, 내가 이 정도 준비도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나?”
“오해야…!”
나는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엘레노아는 그런 일을 하려고 온 게 아니야!”
“하! 웃기지 마라.”
볼프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이미 옛 발테른의 가신들이라 자처하던 놈들에게 공격받아 로엔덤은 피를 흘렸다.”
그가 내 앞까지 다가와 차갑게 내려다봤다.
“그놈들의 구심점이 되어 발테리아에 모습을 드러내 놓고…. 이제 와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고?”
볼프람의 눈빛이 흉흉하게 가라앉았다.
“나를 우롱하는군.”
“엘레노아는…. 엘레노아는 그저 얘기를 들으려고, 얘기를 들으려고 온 것뿐이야.”
어떤 말을 해야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우린 제도로 돌아가려고 했어. 하룻밤만 지나면…. 지나면….”
게르하르트 집에서 하루만 머물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말을 잇던 도중 한 가지 가능성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어째서 우린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한 채 엘렌브룩까지 납치된 걸까….
다름아닌 게르하르트였다.
그가 우리를 배신했다.
아니, 정확히는 엘레노아를 배신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일화를 늘어놓으며 웃던 모습도, 성장한 엘레노아를 바라보던 애정 어린 눈빛도 모두 우리를 속이기 위한 가면이었다.
따뜻한 음식과 새 옷을 내어주고, 제도로 돌아갈 마차를 구해주겠다고 약속한 것까지….
처음부터 우리를 안심시킨 뒤 로엔덤에게 넘기기 위한 연기였던 것이다.
“젠장…….”
엘레노아가 그를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고 나까지 경계를 풀어버린 것이 독이 되었다.
엘레노아가 어린 시절부터 믿고 따르던 사람이었고, 나 역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아무런 의심 없이 그를 믿어버렸다.
이미 뒤늦은 후회감이 몰려들었다.
“게르하르트….”
내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흥. 다 늙어빠진 대장장이가 큰 일을 하긴 했지. 그 가증스러운 반란자들을 한곳에 모아 주었으니까.”
“크윽….”
분명히 엘레노아를 바라보던 게르하르트의 두 눈엔 애정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너희들은 로엔덤의 땅에서 감히 로엔덤을 공격한 대가를 치룰 것이다.”
“잠깐…! 잠깐만! 뭐 하는…, 읍!”
볼프람을 향해 다급히 외친 순간, 거친 천 뭉치가 입 안으로 밀려들었다.
“으읍! 읍……!”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재갈에 막힌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으로 뭉개졌다.
그때 볼프람이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년은 마차에 실어라.”
잠시 뜸을 들인 그의 입가에 불쾌한 웃음이 번졌다.
“저택으로 가는 동안 심심하지 않게 말이야.”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릿속에서는 가장 끔찍한 광경들만 쉴 새 없이 떠올랐다.
“으으읍! 으읍!”
나는 미친 듯이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곧 병사 하나가 축 늘어진 엘레노아를 거칠게 붙잡아 끌고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게르하르트의 아내가 만들었다고 했던 아름다운 드레스는 가슴팍이 찢어져 그녀의 가슴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를 부축한 채 데려가던 병사는 부축하는 척 손을 브레지어 안으로 넣어 그녀의 가슴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볼프람은 그걸 보고 오히려 비릿하게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민. 네 젖소가 고작해야 병사한테 주물러 지고 있군.”
“으읍읍!”
“꽤 궁금하군. 만약 젖소년이 깨어났을때 눈앞에 있는 게 나라면 어떤 비명을 지를지 말이야. 아쉽게도 그 재미는 나만 즐기겠군.”
“읍! 읍!!”
“아니지…. 차라리 내 마차가 아니라 병사들의 마차에 태우는 것도 재밌겠군. 과연 병사들이 반란의 주동자를 어떻게 다룰 지 궁금해.”
“으읍!!”
나는 이를 악문 채 눈앞의 볼프람을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목을 물어뜯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지만, 지금의 나는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볼프람은 그런 내 시선을 즐기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이윽고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누군가 뒤에서 검은 천을 가져와 내 눈을 거칠게 둘러쌌다.
시야가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곧이어 양쪽에서 몸이 붙잡혔고 다시 차가운 나무 바닥 위에 눕혀졌다.
쿵!
머리 위에서 상자 덮개가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짐마차는 다시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자 너무나도 무기력했다.
지난번 토벌전때 광신도들과 싸울때도 미래시를 사용하지 못했었지만 그래도 마력으로 신체 강화를 할 순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마저도 불가능했다.
로엔덤은 사실 옛 신을 믿는 광신도 집단이었나?
도대체 어떻게 내 몸을 강화하는 것조차 막아버린거지?
엘레노아는….
엘레노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를 구해줄 사람이 있을까?
루크레치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의문과 불안, 엘레노아를 향한 걱정이 한꺼번에 뒤엉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덜컹!
커다란 충격과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
잠시 후 바깥에서 여러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몸이 살짝 붕 뜨더니 위아래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마차 바퀴가 굴러갈 때의 흔들림과는 달랐다.
누군가 상자째로 나를 들어 옮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온 신경을 바깥으로 집중했다.
발걸음의 수와 방향, 바닥의 재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울림까지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어떻게든 이들이 나를 옮기는 경로를 기억해둬야 했다.
쿵
바닥에 닿는 충격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곧 나무 덮개가 삐걱거리며 열렸다.
누군가 내 어깨와 다리를 붙잡아 상자 밖으로 끌어냈다.
차가운 바닥에 등이 닿은 뒤에야 몸을 옭아매고 있던 구속이 차례로 풀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력을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쿵!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여러 사람의 발걸음이 점차 멀어졌다.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쯤 몸을 일으켜 가장 먼저 머리 뒤로 손을 뻗어 눈을 가린 천을 풀어냈다.
이어 입안의 재갈을 거칠게 뽑아내자 눌려 있던 턱과 입가에 뒤늦게 통증이 밀려왔다.
“후우…….”
막힌 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폈다.
축축한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고 쇠창살 너머로 보이는 긴 복도에는 횃불 몇 개가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지하 감옥으로 보였다.
쇠창살 너머를 살펴봤지만 간수는 보이지 않았다.
탈출하지 못할 거라 자신하는 걸까….
“흐으응….”
그때 바로 뒤에서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제야 같은 곳에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다만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는 양손이 천장에서 내려온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여자는 간헐적으로 가느다란 신음을 흘릴 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게다가 다리 사이에 하얗게 말라버린 정액 자국들을 보면 그녀가 어떤 끔찍한 짓을 당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혹시….
혹시 눈앞의 여자가 엘레노아였다면….
“젠장!”
엘레노아가 처했을지도 모를 상황들이 떠올라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주먹을 움켜쥔 채 옆의 돌벽을 힘껏 내리쳤다.
쾅!
둔탁한 소리가 감옥 안에 울려 퍼졌다.
그때 벽 너머에서 낮고 걸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클클클…. 기운 찬 사람이 들어왔군. 환영해.”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벽 너머에 갇힌 자가 말하고 있는 듯했다.
“다른 놈들은 혼자 감방 안에서 썩어 가는데, 그쪽은 그래도 외롭지는 않겠어.”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불쾌한 웃음을 흘렸다.
“곁에 박아댈 여자가 있으니 말이야.”
“…….”
저급한 말에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벽 너머의 남자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여자의 희미한 신음 소리만 들려왔다.
그러다 그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형씨는 왜 여기에 들어왔지? 자네도 반란을 일으켰나?”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죄수에게 사정을 털어놓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에 결국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그래? 그렇다면 형씨도 제국 기사인가 보네.”
“……형씨도?”
무심코 되묻고 말았다.
“그 말은 당신도 제국 기사라는 뜻입니까?”
“나는 아니야.”
벽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형씨와 함께 갇혀 있는 그 여자가 제국 기사라는 뜻이지. 로엔덤의 후계자가 이곳에 쳐넣는 자들은 둘 중 하나거든. 반란자거나 제국 기사거나….”
나는 다시 바닥에 쓰러진 여자를 바라봤다.
“저 여자가……?”
“리자드맨의 습격에 대처해 달라며 이곳에 머물던 로엔덤의 후계자를 찾아왔던데?”
남자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신이 나 있었다.
“그러다 저 꼴이 됐지. 꽤 들어줄만 했어!”
“그게 무슨….”
“로엔덤의 후계자. 생긴 것만큼이나 흉악한 놈을 가졌거든. 처음엔 앙칼지게 거절하며 제국이 어쩌고 황제가 어쩌고 했는데 한번 박아주니까 숨소리조차 제대로 못내더군. 그다음 그놈이 미친 듯이 박아 댈 때마다, 여자가 조수를 뿜어 대는 소리가 벽 너머까지 들리는 거야!”
머릿속에서 끔찍한 상상이 스쳐 지나간다.
지하 깊은 곳, 아무도 오지 않는 감옥.
그곳에 끌려간 엘레노아는 알몸으로 쇠사슬에 묶여 허공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볼프람이 두꺼운 자지를 내보이며 그녀에게 다가간다.
엘레노아가 애원하고 소리치며 거부하지만 볼프람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그녀의 음부 안에 꽂아 넣는다.
두꺼운 자지가 그녀의 안을 꿰뚫고 들어와 연약한 배 위로 윤곽을 드러낼 정도로 깊숙히 박힌다.
“허억!”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나올 듯 뛰었고, 손끝은 분노와 공포로 잘게 떨렸다.
엘레노아가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왔고, 볼프람을 향한 살의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와 동시에 미친듯이 흥분됐다.
자지가 빳빳하게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원래라면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득 찼어야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조금 희미해졌다.
오히려 더한 걸 원하고 있었다.
이 두 눈으로 그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젠장! 젠장! 젠장! 볼프람!!”
그 욕망을 애써 외면하려고 소리치며 벽을 거칠게 두드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상관없다는 듯 감옥 안에는 내가 만든 소음과 이죽대는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희미한 여자의 신음소리만 들려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제풀에 지친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하나씩 정리했다.
이대로 절망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이 감옥에서 빠져나가 엘레노아를 찾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