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EP064-외전-사랑 놀이 (1)
사랑은 장난이다.
‘너를 사랑하는 나’에 심취해서 뭐든지 해줄 것처럼 떠들어대다가 사소한 어긋남 때문에 허무하게 끝이 나버리는, 재미없는 장난.
영화나 드라마, 문학에 존재하는 사랑은 결국 사람들의 동경으로 관심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자극적인 소재에 불과해.
순애? 지랄을 하네.
그런 건 자신의 품격을 드높이기 위해 있어 보이는 척을 하는 머저리들이 떠는 꼴값이지.
그걸 하는 년놈들도, 그런 걸 좋아하고 바라는 인간들도….
다 똑같아.
“레나, 왜 한 잔도 안마셨어? 다른 거 시켜줄까?”
“…….”
“미… 미안.”
“쟤 누가 불렀냐?”
“몰라… 무서워.”
“야, 말이라도 좀 걸어봐. 거의 처음 나온 거 아니야? 레나 쟤.”
“한 마디만 해도 화낼 것 같은데.”
고작 껍데기에 불과한 겉모습에 쫄아서 말도 똑바로 못 거는 한심한 새끼들….
하도 같이 좀 놀자고 징징거려서 하루 어울려주려고 왔더니, 뭐하자는 거야?
“레… 레나는 남친이나 썸타는 사람 있어?”
“…….”
“어, 없나? 왜… 인기 많을 것 같은데.”
“그런 건 시간 낭비니까.”
“시간 낭비? 혹시 레나, 남자 만나봤어?”
“…….”
“아… 모쏠이구나?”
지금 뭐라고… 하, 됐어.
착각하지 마. 그런 시시한 사랑 놀이,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거니까.
“혹시 어떤 스타일 좋아해? 관심 있으면 내가 소개시켜줄….”
“…쯧.”
벌떡-
역시 이런 의미 없는 모임에 나온다는 것부터 잘못됐어.
하지만… 이대로 그냥 나가버리면, 이 멍청한 것들은 내가 도망쳤다고 생각을 할 테니까.
신입생들이 앉은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서, 적당히 잘생긴 놈을 한 명 고른다.
이미 옆에 이름도 모르는 한 년이 붙어있긴 한데… 어쩌라고.
오히려 잘 됐네. 너희들이 하는 사랑 놀이가 딱 이런 수준 아니야?
“야.”
“…네?”
“일어나.”
“왜… 왜요?”
왜냐고? 내가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으니까.
그 시시한 소꿉장난도 못하는 어리숙한 꼬맹이로 보일 수는 없잖아.
“좀… 마음에 들었거든, 네가.”
“어, 어어….”
허겁지겁 의자에서 일어나는 너도, 흠… 딱히 다를 건 없어 보이네.
느껴져. 등 뒤에서 나를 빤히 지켜보는 시선이.
내가 겨우 이런 것도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건지… 참, 수준 하고는.
“이름이 뭐지?”
“스, 승윤입니다. 김승윤.”
“그래. 나는 레나 로마노프. 그럼… 나갈까?”
“어… 나가요? 아, 네, 넵….”
띨띨한 표정도 제법 볼만하네.
이런 재미로 누군가를 만나는 거라면 약간은 이해가 되기도 해.
하지만 그런 감정은 결국, 사랑이 아니라 흥미에 가까운 거잖아?
“…쯧.”
“어…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너무 쉬워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야.
예상한 것보다 조금 이르게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안하고 이대로 이 멍청한 놈을 보내면 변하는 게 없지.
어차피 너희들이 얘기하는 사랑은 결국… 다, 그거니까.
떡.
“집, 이쪽?”
“네? 어, 네… 네.”
“떡 쳐봤어?”
“…아뇨.”
“나랑 치고 싶어?”
“…….”
“솔직하게 말하면 하게 해줄 수도 있는데.”
“어, 어어….”
“대답해.”
“…네.”
봐.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을 얻어내는 게 얼마나 쉬운지.
허무한 육욕, 덧없는 불장난.
보니까 이 띨띨한 신입생도 그런 멍청이들이랑 비슷한 부류의 사람 같네?
“똑바로 부탁해봐. 나랑 하고 싶다고.”
“…서, 선배랑 해보고 싶어요.”
“흐응….”
이건 살짝… 재미있네.
이미 다른 년이 달라붙어서 관심을 보이던 남자가 나를 사랑해보고 싶다면서 부탁하는 꼴을 보는 거.
“좋아.”
“…….”
“마침 바로 보이네. 모텔. 저기로 가지.”
내 첫경험?
음… 처녀 같은 것도 결국 사람들이 정한 변덕스러운 가치를 지닌 껍데기지.
사랑이 결국 의미가 없다는 내 이론을 영원히 뒷받침해줄 증거와 맞바꾸는 거라면, 오히려 내가 이득 아닌가?
“혹시나 해서 먼저 말하는 거지만… 네가 날 따먹는 게 아니야.”
“…네?”
“내가 널 따먹는 거야. 잊지마.”
“…….”
“알겠어?”
“네, 네….”
쫄기는.
그러면서 바지 가운데가 살짝 튀어나와 보이는 건… 발기했다는 증거겠지.
따먹힐 생각을 하면서 꼴린 건가? 좀… 웃기네.
남자랑 모텔에 오는 건 처음이지만 딱히 어려운 점은 없었다.
카운터에서 키를 받고,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어색하게 서있는 네 꼴이 웃겨서 잠시 감상도 해주고.
“상상하고 있어?”
“네?”
“나랑 떡칠 상상하느라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냐고.”
“…….”
숨이 거칠어졌네. 흥분했다는 증거지.
이런 한심한 남자를 기분 좋게 해주려고 허리를 흔드는 수고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데.
뭐… 대충 침대에 엎드려 있으면 알아서 적당히 해대다가 끝나겠지.
***
“…?”
뭐지?
이… 위화감. 낯선 감정.
매일 아침 눈을 뜨는 내 방의 침대, 모서리에 처박힌 인형, 꼼꼼하게 드리워진 커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이상하다.
“…….”
머리가 조금 아프다.
이따금 찾아오는 두통이 머릿속을 콕콕 찌르는 느낌이라면… 이건 조금 다르다.
붓질을 막 끝낸 캔버스에서 올라오는 덜 마른 물감의 질척한 냄새? 향기?
폐 속에 달라붙는 텁텁함? 이건 뭐지?
“어제 그 자리에 간 게 실책이었나….”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에 일단 게임부터 킨다.
머리가 아프다고 해도 루틴은 중요하니까.
누운 채로 휴대폰을 위로 들어 게임 아이콘을 누르면, 짧은 로딩과 함께 순간적으로 화면이 검게 물든다.
검게 물든 화면은 꼭 거울 같다. 내 모습을 선명하게 비쳐주니까.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속에서 나는, 낯선 무언가를 보았다.
“…음?”
로딩이 끝나고 게임 타이틀 화면이 떠오르지만, 다시 홈 화면으로 나가서 카메라 아이콘을 누른다.
셀프 카메라 모드로 바꿔서 내 목덜미를 확인해보면….
“이건….”
불그스름한 흔적.
벌레에 물렸다고 하기에는 가려운 부분도 없고 딱지가 진 것도 아니다.
이건… 피부 위에서 강한 흡입력이 가해져 모세 혈관이 미세하게 터진 흔적이다.
속된 말로 키스 마크. 키스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추잡스러운 행위의 결과물인데 말이지.
하지만 이상해.
내가 잠든 사이 집에 들어와서 목에 입을 댈 정도의 정신나간 놈은 없….
“…잠깐만.”
어제 같이 가게를 나왔던 그… 김승윤, 그 새끼.
모텔에 같이 들어갔지, 분명?
나를 사랑 한 번 못해본 애새끼로 비웃는 년들에게 반박을 해주기 위한 도구로 써먹으려고.
그런데 왜….
“그 새끼가 내 목에 입을 댄 기억이… 없지?”
***
“야.”
“네, 네?”
“너… 나한테 뭔 짓을 한 거야?”
“네? 아… 아무 짓도 안했는데요.”
“거짓말. 내 눈을 보면서 솔직하게 말해.”
시선을 피하고 말을 더듬는, 거짓을 지어내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
이렇게 띨띨하고 멍청한 새끼가 내 머리에 무슨 짓을 한 거야? 감히.
“어젯밤에 같이 모텔에 들어간 이후로 있었던 일들을 납득 가능하게 설명해 보라고.”
“서, 서, 선배님? 주변에서 다 듣고 있-.”
“당장. 말해. 이 자국, 네가 만든 거지?”
“…네.”
“그런데 왜 내가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는 거냐고.”
주변의 시선 따위가 내 평판을 깎아내릴 수는 없다.
설령 그런 게 가능하다고 해도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나는 알아야겠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선배, 술 기운 때문인지 눕자마자 바로 잠드셔서….”
“…….”
아하.
너… 내가 기억을 못한다는 걸 알고 있구나.
그런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이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내가 포기할 것 같아?
“그래?”
“…….”
“오늘 강의 끝나고, 바빠?”
“…저 아, 알바-.”
“그럼 알바 끝나고, 바빠?”
“…아뇨. 그런데 좀 늦게 끝나서….”
“어디서 아르바이트하는 지 말해. 언제 끝나는지도.”
“왜… 왜요?”
얘는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처럼 아주 멍청한 사람은 아닌 것 같네.
하지만, 최소한 내가 이 기억의 공백과 수상쩍은 네 언행이 무엇 때문인지는 알아야겠어.
“너랑 떡치는 게 존나 좋았거든.”
“…….”
“한 번 더 하려고. 싫어?”
“어… 아, 아니, 그… 별로 좋았던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
“나는… 기억이 안나는데.”
확실해졌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 이 신입생은 알고 있다.
감히… 나도 알지 못하는 걸 네가 알면 안되지.
“휴대폰 줘.”
“네?”
“멋대로 도망치면 안되니까.”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낚아채서 내 번호로 전화를 건다.
부재중 전화가 찍히는 걸 확인한 뒤, 끊고 다시 휴대폰을 돌려준다.
“저장해. 레나 로마노프.”
“…….”
“내가 보는 앞에서.”
“아… 알겠어요.”
연락처에 내 번호가 저장되는 걸 확실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돌아설 수 있었다.
목줄을 채웠으니 도망칠 일은 없을 거다.
멋대로 도망치게 둘 생각도 없고.
아, 그래.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지.
‘어디서 아르바이트 한다고? 언제 끝나는지도 말해.’
‘학교 정문 앞 편의점에서 10시까지 해요’
답장은 빠르네.
10시…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어차피 확인만 하고 나오면 되니까 문제없지.
아, 그래.
원리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 가볍게 준비를 해둘까?